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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 이야기




우협시 대세지보살좌상 양협시불에서 발견된 중수기에 따르면 1767년에 중수되었고 만정(萬澄)과 성옥(性玉)이 담당하였다.

본존상은 17세기 양식으로 경주불석(옥돌)으로 제작되었으며 수인은 오른손을 아래로 내려 항마촉지인을 표현하고 있으며 왼손을 엄지와 2지를 맺고 있는 아미타수인을 취하였다. 법당이 좁은 조선시대 불상의 특징인 머리를 약간 앞으로 숙여 내려보는 자세이다. 1685년을 전후한 불석 조각승 승호(勝浩)에 의해 제작되었고 울산지역에서 가장 오래된 불석재 불상이다.

좌협시 관세음보살 상호는 본존과 유사하며 보관 상단중앙에 아미타여래좌상을 모시고 있다. 바닥은 나무로 덮개를 마련한 것이 특이하다.





아미타삼존후불탱화는 현재 백양사 응진전에 봉안되어 있다.
그림의 가장자리에는 목재로 표구가 되어 있고, 화면은 그대로 노출 되어 있다.
삼베바탕에 붉은색을 칠한 뒤 백색선으로 윤곽을 그린 선묘불화로 도상구성은 중앙 아미타불을
중심으로 좌우로 관세음보살과 대세지보살이 배치된 아미타삼존이다.
19세기 중·후반 약 40여 년간 작품 활동을 한 수화승 영운의 말년 작품으로 1878년 울산 백양사에
봉안되었다.
조선후기 홍탱의 표현양식과 제작자를 중심으로 한 화풍을 연구하는데 자료적 가치가 높은 탱화로
지정하여 관리보존이 인정되는 작품이다.



백양사 응진전 우측 신중단에 봉안된 불화이다.
본 작품은 화면 하단에 마련된 화기의 내용을 통해 1878년 아미타후불홍탱과 함께 봉안된 신중탱 임을 알 수 있다.
본 작품은 제작시기와 제작자가 뚜렷할 뿐 아니라 조선후기 신중탱의 표현양식과 제작자를 중심으로 한 화풍을 연구하는데 자료적 가치가 인정되는 작품이다.



이 부도는 백양사 창건주인 백양조사의 부도로서 하대, 중대, 상대석으로 이루어진 기단부에 구형의 탑신과 8각의 옥개석을 지닌 전형적인 편구형 탑의 양식을 보여주고 있다.
이 같은 양식은 조선후기 통도사를 중심으로 한 경상도 일대에서 유행 했던 양식으로 시기적으로는 17세기 말에서 18세기 말까지 약 100년간 유행하였다.
백양사 부도는 양식상 18세기 경상도 일대에서 유행한 석조미술 양식 연구에 귀중한 자료로 평가된다. 또한 지대석부터 상륜까지 보존상태가 양호하며 같은 시기 부도에 비해 비교적 대형에 속한다. 따라서 백양사 석조부도는 울산유형문화재로 충분한 가치를 지닌다.



백양사의 창건에 대해 명확히 알려진 바는 없으나, 1960년대에 편찬된 [한국사찰전서]에 따르면, 932년 백양조사가 창건한 후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으며, 1678년 연정선사가 중창하였고, 1753년 설인선사가 다시 중창하였다고 전한다. 이후 조선 후기까지 이어지다가 구한말과 일제강점기에 접어들며 사세가 약화되어 퇴락하였으나, [차사중창주비구니보현대공덕비]의 기록에 따르면, 1922년 비구니 승려 보현에 의해 백양사가 중건되었으며, 1927년에 칠성각, 1932년에 명부전과 백양선원 등이 건립되었다고 한다.
한편, 1933년 신문의 기록에서 보현이 당시 약9개 동의 건물을 증건하였다는 내용과 1930년대 초에 촬영된 사진에서도 대웅전과 칠성각의 건물이 나란히 위치한 것을 찾아 볼 수 있다. 그리고 칠성각 내부에 편액되어 있는 [백양사선원칠성계안서]의 내용 중 칠성각 건립 시 시주한 사람들의 명단과 더불어 그 작성시가 1930년임을 볼 때, 칠성각은 1930년 전에 조성되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칠성각은 정면 3칸,측면 1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3량 가구로 구성되어 있다. 대공은 특별한 초각이 없는 네모 대공인데, 판자형식으로 얇게 만든 것이 특징적이며, 보와 서까래 등은 심하게 휘어진 부재를 특별한 가공없이 피죽만 벗겨 사용하였기 때문에 자연미가 풍부하다. 공포는 이익공으로 초공과 이익공 모두 양서이며 연화를 초각하였다. 내부 단청의 경우 근대 안료를 사용하였으나 조선 후기 단청의 계보를 잇고 있는 것으로 확인된다.
백양사 칠성각은 1920년대에 건립되어 근,현대기를 거치며 기단과 주초, 마루 등에서 일부 변형이 있었지만 초창기 기능이 그대로 유지되고 있고, 조선 후기 한국전통건축의 양식을 근대기에 잇고자 하는 등 과도기적 양상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라는 점에서 학술적 가치가 높다고 할 수 있다.